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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무장하고 중생구제 실현토록 수호     2006.6.28

 

 

높은 수미좌에 강건한 자태로 앉아 있는 약사유리광여래, 가녀린 긴 손가락을 모아 합장하는 아리따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찬연한 금빛 육신의 이들 약사 삼존은 주색 자색 청색의 명료한 채색과 다채롭고 풍부한 장식으로 단연 그 존재가 돋보이는데, 이들을 이렇게 돋보이게끔 하는 또 다른 것은 바로 이들을 주변에서 외호하는 십이신장(十二神將)의 존재.

약 3년 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불화를 조사를 하던 중, 한국 작품이 한 점 더 있다며 우연찮게 소개받은 것이 이 ‘약사삼존십이신장도’였습니다(그림1). 정리 안 된 부산스런 유물 창고 속에서도 이 작품에서 발산되는 서릿발 같은 기개는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습니다. 막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마지막 터치 후 붓의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인 듯, 그렇게 작품의 색과 선은 광채를 내며 생생히 살아있었습니다.

약사삼존의 주변으로는 진기한 모습의 십이신장이 운집해 둘러있습니다. 이들의 검은 피부와 개성 강렬한 기괴스런 표정 그리고 견갑의 무복 표현은(그림2,3,4,5), 견고한 포즈의 단아 근엄한 약사삼존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어 내어, 금빛 육신의 삼존을 더욱 환하게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옷에 가득 시문된 타원형 꽃문양은 거리를 두고 보면 마치 귀갑문(龜甲文)과 같이 보이는 독특한 효과를 냅니다. 길게 뻗친 검은 머리 가닥과 경직된 듯 흐르는 옷자락과 더불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양 협시보살은 무엇보다도 먼저 감상자의 눈에 포착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뒤에 가득 포진된 십이신장입니다. 보기 드문 회화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이들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으로 그 활달한 개성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작품 하단에 있는 붉은 구획 속 금글씨의 화기에는 ‘대비전하(大妃殿下)가 주상전하(主上殿下)의 장수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채색화 석가수도회도 2점, 채색화 약사도 1점 및 지장도 1점, 순금화 치성광회도 1점을 발원했다’라고 쓰여 있어 왕실의 대비마마가 의뢰한 총 5점의 작품 중 한 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의 화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휘와 문장 패턴 그리고 존상의 육계, 대좌, 인체 프로포전 등 작품의 형식적 특징을 고려해 볼 때, 16세기 조선왕실의 궁정양식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정왕후 발원의 일련의 작품군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래서 본 작품 역시 16세기 조선전기로 그 시대를 추정해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단 이들 문정왕후 관련 작품군의 필선과 화격을 비교해 볼 때, 본 작품의 명확하고도 날카로운 필력과 그 풍부한 회화적 묘사력은 심히 월등하여 아마도 당시 16세기 궁정양식의 전범(典範, 모범적 모델)으로 당시 양식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는 역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소위 ‘인명 없는 미술사’라 여겨지는 전통 속에서도, 통일신라시대 미술을 단번에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소조의 마술사 양지(良志)ㆍ고려불화의 신묘한 경지를 개척한 서구방(徐九方)ㆍ불화를 표현주의적 회화로 승화시킨 조선전기의 이자실(李自實)로 이어지는 맥락을 잇는 작품임에 손실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약사삼존십이신장도’ 역시 이자실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본 작품은 ‘숭유억불’이라는 당시 불교탄압의 먹구름을 한숨에 걷어버릴 듯한 밝고 명료한 필치로 그 바로크적 활달함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가 그려진 불화에 각종 무기와 갑옷과 투구로 투철하게 무장한 십이신장이 등장하는 연유는 무엇일까요.

약사여래가 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열두 가지의 큰 서원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12대원(十二大願)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원 광명보조(光明普照 스스로를 지혜의 빛으로 밝혀 가없는 세계를 비추리라), 제2원 수의성변(隨意成辨 드높고 빛나는 위덕으로 중생을 모두 비추어 깨우치리라), 제3원 시무진물(施無盡物 필요한 물건을 마음껏 얻게 하여 궁핍함이 없게 하리라), 제4원 안립대승(安立大乘 삿된 길에 빠져 있더라도 편안한 대승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리라), 제5원 구계청정(具戒淸淨 청정한 법을 닦아 삼취계를 갖추게 하리라), 제6원 제근구족(諸根具足 온전치 못한 몸과 정신을 가진 일체 불구자를 완전케 하리라), 제7원 제병안락(除病安樂 온갖 병을 없애어 몸과 마음을 안락케 하리라), 제8원 전녀득불(轉女得佛 여인의 몸으로 핍박받는 자 있으면 장부로 태어나 성불케 하리라), 제9원 안립정견(安立正見 모든 유정에서 비롯되는 악마의 그물과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바른 길로 이끌리라), 제10원 제난해탈(除難解脫 속박과 재난 능멸 등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리라), 제11원 포식안락(飽食安樂 굶주림을 참지 못해 나쁜 짓을 한 자라도 배부르게 하리라), 제12원 미의만족(美衣滿足 헐벗은 이에게 좋은 옷을 주어 만족케 하리라).

십이신장은 이상의 12대원이 실현되도록 이를 수호하는 호법신입니다. <약사본원경>의 이 12대원의 내용을 살펴보면, 온전한 몸을 받지 못한 불구자들, 병을 앓아도 돌보아줄 이조차 없고 의사나 약은 물론이요 친지도 없고 머무를 집조차 없는 가난한 이들, 학대받는 여성, 감옥에 갇힌 재소자들, 당장 목마르고 헐벗고 굶주려 민생고에 시달리는 이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거룩한 다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회의 모든 약자와 은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극한 어둠 속의 중생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물질적인 이익을 베풀겠다는 직접적인 단언입니다. 이러한 대원을 실현시키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단단히 무장하고 굳건히 추진시켜야 하겠지요.

이러한 설법을 듣고 있던 대중 가운데 십이야차신장이 있었답니다. 또 이 십이신장에게는 각각 7000명의 야차가 권속으로 딸려 있었는데, 이들은 함께 목소리를 모아 “저희들 권속이 맹세코 중생을 호위하여 이들이 온갖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원하는 바를 남김없이 만족하게 이루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약사신앙 유래의 십이신장은 중국 자생의 12지(十二支) 신앙과 습합되어 방위 및 시간을 관장하는 수호신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능묘의 병풍, 석탑 및 사찰건축의 기단부 등에 응용되어, 중생 개개인의 안녕뿐만 아니라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호법신으로서 그 상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힘차고 강건한 12신장이, 밤낮 12시를 차례로 지키고 또 열두 방향(동서남북 사방을 셋씩 나누어 세분화한 것)에서 시시각각으로 밀려드는 8만 4천의 번뇌를 막아주고 있다니, 오늘밤도 잠 못드는 고민의 심연 속에 괜스레 몸을 뒤척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강소연 박사(홍익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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