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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빛

위빠사나
2020.03.06 14:00

위빠사나16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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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11-16-47.jpg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한 덩어리가 아니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가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면, 그동안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서 나라고 알았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을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으로 해체해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이제 몸과 마음은 단지 물질과 정신이고,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님을 압니다.

 

(2)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이 원인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결과일 뿐 그것을 나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매순간 조건에 의한 흐름 있다는 것을 아는 눈이 생깁니다.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항상하지 않고 계속 변하며 이것이 괴로움이고 내가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지혜의 과정입니다.

수행자는 이 단계에서 고통과 비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로 몸에서 통증, 쑤심, 경련, 나른함, 가려움, 혐오, 메스꺼움, 흔들림, 머리의 무거움, 무거운 발걸음 등의 온갖 종류의 불쾌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표상으로는 장례식, 군대, 귀신 등 무섭고 두려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을 그냥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표상이 보이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두려우면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괴로운 느낌과 끔찍한 표상을 보며,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조금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매순간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알게 되어, 괴로움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수행자가 원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평화와 편안함을 경험하고 싶은데, 이 몸은 내가 다스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무아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상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조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괴로운 현상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수행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계속 알아차리면, 이런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가게 됩니다.

 

(4) 생멸의 지혜

통증 등의 괴로운 느낌들을 알아차려 그들의 성품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가 분명하게 현재의 통증, 쑤심, 욱신거림에 초점을 맞추고 정확히 알아차릴 때, 이 통증이 일어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수행자는 알아차림으로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 시작합니다. 점차 통증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하여 통증의 괴로운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제압하며, 이 통증을 아는 마음도 통증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현상의 사라짐을 좇아가는 것이 괴롭고, 이런 괴로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수행자는 느낌의 무상함, 괴로움, 무아를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 단계는 3단계의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에서 느꼈던 괴로운 느낌은 모두 사라지고, 몸과 마음의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그냥 편안하게 대상을 능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바름이 생겨 모든 일을 바르게 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행자의 표정이 항상 온화하며, 부드럽고, 예의 바르며, 행동이 조용하고, 은은하며,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생긴 희열의 즐거움은 범부가 갈애로 느끼는 즐거움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면 더 이상 수행이 진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즐거움에 머무르려는 탐욕을 버리고, 이 편안하고 즐거운 희열의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합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이 희열의 느낌도 꿰뚫어보듯이 분명히 알아차리면 즉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다보면 즐거운 느낌이 무상하고, 바로 괴로움이고,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아는 지혜가 다시 생깁니다. 이제 수행자는 즐거움에 머물려는 탐욕을 버리고, 알아차림을 통해 즐거운 느낌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고, 현재의 즐거운 느낌을 붙잡지 않습니다.

 

(5) 소멸의 지혜

이 단계는 대상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해져, 일어남은 분명하지 않고 사라짐만 느껴지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점점 알아차리는 대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상과 아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수행자는 정신적요소나 물질적요소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며, 소멸의 속도가 너무 빨라 심한 고통은 느끼고, 이것은 비참한 일이며 괴로움이라고 압니다. 이런 사라짐과 이런 심한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알고, 오온을 통제할 수 없는 무아를 좀 더 깊게 알게 됩니다. 소멸의 지혜에서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두려움에 대한 지혜

이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수행자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일어납니다. 언제나 바로바로 사라지는 오온에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고, 수행자는 오온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7) 고난의 지혜

이제 이런 두려움 덩어리인 오온이 잘못된 것이며, 오온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때는 표상으로 썩은 것, 피가 흐르는 것이 나타나며, 이것을 대상으로 고난을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8) 혐오감에 대한 지혜

점차 수행자는 오온이 진저리쳐질 만큼 싫어져서 오온을 혐오하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오온에는 어느 것도 안정적인 것이 없으므로, 이제는 오온을 정말 혐오하며 집착을 줄여갑니다.

 

(9) 해탈을 원하는 지혜

이제 수행자는 오온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천상 세계라도 거기서 다시 오온을 가지고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오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조차도 그냥 놓아버리지만 알아차림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

그러나 여기서 이래서는 진정한 평온, 진정한 재산인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하여 오온을 살펴보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는 그동안 오온을 어부가 잡아 올린 맛있는 물고기처럼 알았는데, 이제 오온이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줄을 가진 독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독뱀을 낚은 어부는 이 독뱀을 그냥 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독뱀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어부가 독뱀을 그냥 놓아버리면 다시 독뱀에게 물릴 것 같아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독뱀의 목을 꽉 잡고 아주 멀리 던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혜의 수준에서 수행자는 매우 많은 괴로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쑤심, 통증, 경련, 압박, 무거움, 동요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머리부터 무거운 것이 찍어 내려누르는 느낌으로, 허리가 꺾여서 바닥에 닿을 것처럼 무겁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이런 고통과 아픔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다시 다른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고통과 아픔의 느낌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들은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알아차리는 것이 즐거웠지만 이 단계에서는 수행이 즐겁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어렵고 잘 이어지지 않아서 자기 생각에는 수행이 퇴보한 것처럼 느껴져서 절망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가 정상이 아니고 미쳐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다시 수행처로 돌아와 수행을 새로 시작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이 단계는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단계입니다. 몸도 안정적이지 않아 자주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하고, 마음도 들떠서 좌선을 하면 조금 있다가 경행이 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일어나 경행을 하면 그것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매우 낮은 지혜의 수준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현상을 독뱀을 다시 한 번 꽉 쥐는 것과 같은 노력으로 이겨내면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이 단계에서는 앞에 다시 살펴보는 지혜와 상반되는 경험을 합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자동으로 일어나서 알아차림이 대단히 좋아집니다. 이제는 두려운 마음도, 집착하는 마음도, 놀라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부딪치는 즐거운 것이나 참을 수 없는 것이나 모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여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절로 알아서 작용하며, 수행자는 마치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이 모든 긴장에서 벗어나 있어 매우 편안합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수행자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꿰뚫어보는 알아차림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평등심에 머물고 싶은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이것이 평등심에 안주하고 있는 어리석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 다음 단계의 지혜를 성숙시켜야합니다.

수행자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을 꿰뚫어보듯이 지켜보면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제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의 16단계 지혜의 발전과정은 수행자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괴롭고, 즐겁고, 평온한 느낌을 모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느낌에서 갈애를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의 지혜 중 11단계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까지는 수행자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인 12단계에서 16단계의 지혜는 수행자가 쌓아놓은 선업의 바라밀 공덕이 충분할 때, 즉 자신이 행한 선한 바라밀 공덕의 과보가 받쳐주어야 수행을 이어서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14단계 도의 지혜와 15단계 과의 지혜인 열반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보시와 지계로 바라밀 공덕을 쌓으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와 지계는 알아차림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면 저절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이는 바로 알아차림을 하는 마음의 습관을 들여서 일상에서 항상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가신 길이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해탈열반을 향해 나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정신적 현상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단계는 해탈열반을 향해서 가는 수행자는 누구나 경험해야하는 길이며, 그 길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 스스로 여기에 비춰보면 지금 자신이 바르게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러운 중생살이에서 성자의 계보로 , 칠청정과 16 단계의 지혜로 본 사성제

 

‘정체성 ’을 거론 하는 이유는

 

불교란 무엇일까 .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때문에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웃 종교의 경우 기독교란 무엇인가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 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

통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정체성 ’을 거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무언가 명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어떤 스님은 불교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 또 어떤 교수는 불교가 저런 것이라고 말한다 . 깨달음도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고 , 또 다른 이는 저렇게 말한다 .

그런데 초기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는 테라와다에서는 불교가 어떤 것이라느니 , 깨달음은 또 어떤 것이라느니 하고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

초기불교는 오로지 고따마붓다의 가르침만 따른다 . 따라서 깨달음도 고따마붓다가 깨달은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 고따마붓다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 그리고 그 실천 수행방법은 무엇일까 .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 부처님이 법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굴릴 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 ’이고 이의 실천 수행 방법은 ‘팔정도 ’라고 명확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과 동일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그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까 .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나와 있는 것이다 . 이를 칠정정과 16 단계의 지혜라 말한다 .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 . 각 단계를 거칠 때 마다 일어나는 독특한 경계를 체험 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도 (magga)와 과 (phala)를 성취할 때 까지 진행된다 .

그 과정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칠청정과 16 단계 지혜

 

칠청정

 

16 단계 지혜

1

계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 (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 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 ṅkhāvitara ṇ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 (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

4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 (bha ṅga Ñāna)

6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pa ṭisa ṅ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6 과 7 사이에

13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

7

지와 견

(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

14

도의 지혜 (magga Ñāna)

15

과의 지혜 (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 ṇa Ñāna)

2010-05-09 진흙속의연꽃

먼저 계를 청정하게 하고

닙바나를 향하여 갈 때 가장 첫번째로 해야 될 것은 무엇 일까 . 그 것은 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 계는 감각적욕망으로부터 수행자를 보호 해 주는 첫번째 울타리인 것이다 . 그런 계는 네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첫째 , 계목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

둘째 ,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

셋째 ,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이다 .

넷째 , 필수품에 관한 계이다 .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순수한 위빠사나의 길을 따르는 수행자는 사마타수행을 채택하지 않는다 . 그대신 계를 청정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과 물질 (명색 , nama-rupa)의 변화에 대한 수관으로 바로 들어 간다 .

이러한 수관은 근접삼매에 필적하고 이를 ‘찰나삼매 (khanika-samadhi)’라 한다 .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이를 ‘마음의 청정 (심청정 )’으로 간주 한다 .

그 어떤 움켜 쥠도 없이

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 칠정정과 16 단계의 지혜를 얻는 것이 목적일까 . 청정범행 (brahmacharya)을 하는 것이 목적일까 . 수행의 목적을 정의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어떤 움켜쥠도 없이 모든 번뇌들을 완전히 절멸 하는 것이다 .”

여기서 움켜쥠도 없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라는 말과 같다 . 초전법륜경에서 말하는 ‘오취온 (五取蘊 , pancupādānakkhandhā)’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 늙음도 괴로움이요 , 죽음도 괴로움이다 . 슬픔 , 비탄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도 괴로움이다 .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의 원천인 오취온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

첫번째 , 정신과 물질을 구별 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나라는 존재가

16 단계 지혜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될 사항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 보면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청정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견청정이라 한다 .

두번째 ,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고 ,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알어차림이 세밀해지면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먹을려고 할 때 먹으려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고 , 이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상태가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를 이루고 있는 오온이 정신과 물질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닌 연기법에 따라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세번째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마치 도 ()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이 단계가 되면 뭉쳐 있던 개념이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무더기로 보인다 . 또 세상이나 모든 존재가 조각 조각 부서져 보이는 것이다 . 이 때 수행은 한단계 급격하게 향상된다 . 수행이 잘 되어서 사띠와 사마디가 균형 있게 유지 되는 이 때 마라가 출현하는데 통상 10 가지로 본다 .

여기서 마라를 빠알리어로 낄레사 (kilesa)라 하고 우리말로 장애라 한다 . 10 가지 장애는 무엇일까 .

빛이다

수행중에 빛을 보는 것이다 . 빛을 보면 수행자가 “아 , 이제 내가 깨달았구나 !” 라고 생각 하기 쉽다는 것이다 .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단순한 현상임에도 불구 하고 그 좋은 경험을 놓지 못하고 남에게 이야기 하지도 않고 혼자 즐가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길이 아닌 길로 가기 때문이다 .

지혜이다

특히 담마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 그래서 “아 , 이게 이래서 그렇구나 !”라고 너무 기뻐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안다는 기쁨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 그런데 그 길로 따라 가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 도가 아니라 비도로 가는 것이다 .

환희심이다

고요함이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고요함에 감싸이게 된다 . 이럴 때 빠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 이것도 그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조건에 따른 결과이다 . 따라서 앞서 언급한 “그 어떤 것도 움켜 쥐지 마라 ”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 고요함이라는 것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이다 . 고요함은 잠시 일어나는 번뇌인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행복이다

행복함 조차도 번뇌로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그 행복감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 그런 행복감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 행복감이 없을 때 고통을 느낀다 . 행복감은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이다

이 때 하는 말이 “정말 부처님 말씀이 맞구나 ”라고 말하며 아무나 붙잡고 전법 하려 하는 것이다 . 오로지 이것 뿐이라는 믿음에 정복 당하는 것이다 .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 그렇게 집착하다 수행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경우 그 믿음이 깨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된다 .

분발이다

경행이 잘 된다고 해서 밤을 세워 하고픈 욕망이 생겨 나는 것이다 . 좌선을 몇시간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 그러다가 뚝 떨어지면 힘을 잃게 된다 . 그런 분발도 그런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 엄청난 노력이나 에너지조차도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

확신이다

“이 길로 가면 틀림없어 ” 라고 말하는 것이다 . 물론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그런 확신도 조금이라도 미약하게 되면 힘을 잃게 된다 . 그럴 때 “나한테 이런 확신이 일어 났구나 ”라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

평정심이다

우뻬카도 안된다는 것이다 . 우뻬카의 상태도 다 다른데 , 다 다름을 보지 못하면 무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 평정심이 되었을 때 “나에게 평정심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알아차리면 되고 , 평정심이 깨졌을 때 억울해 하지 않고 “가버렸나 보다 ” 하고 집착하지 않는다 .

애착이다

잔잔한 기쁨조차도 되비치지 않는다면 애착이 된다 . 그러므로 되비쳐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열가지 장애를 따라 가다 보면 길이 아닌 곳으로 빠지게 된다 . 마치 도처럼 보이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단지 현상으로 알아차리면 그 길에서 벗어나 도의 길로 갈 수 있다 .

네번째 ,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얼굴표정이 맑고 온화하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성숙되는 단계가 생멸의 지혜이다 . 그 길로 잘 접어 들면 네번째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 그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이다 .

이 단계가 되면 모든 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들어 온다 . 개념이 사라지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한눈에 들어 오는 것이다 .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때 수행이 성숙 된 것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승일 것이다 . 생멸에 지혜에 이른 제자는 다음과 같이 스승에게 비칠 것이다 .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 .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에서 )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스승은 수행자를 보기만 해도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제자의 얼굴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

다섯번째 , 무너짐의 지혜 (bha ṅga Ñāna)

보는 즉시 무너지니

변화하는 현상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이제는 일어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라짐만 보이게 된다 .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 발을 디디면 발이 사라지고 ,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사라지고 , 밥을 먹으면 밥이 사라지고 하는 식이다 .

마치 자신이 발만 디디면 이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붕괴가 일어 나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

이 때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각 하지 못하면 거기서 헤어 나지 못하고 허무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 그래서 전에는 이런 감정이 나에게 없었는데 지금 일어 나고 있는 것을 보면 “없었던 것이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 지금 나에게 붕괴가 일어 나고 있구나 ” 하고 “모든 것이 붕괴 하고 있구나 ” 하고 되비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이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그 이전 (생멸의 지혜 ) 까지만 해도 사띠 (알아차림 )할 수 있었지만 , 붕괴가 일어 나는 그 때 부터는 대상이 잘 보이지 않고 자꾸 사라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 그래서 “ 아 , 무너지는 구나 ” 하고 느끼는데 그 때 삼빠잔나 (sampajaÑÑa, 확실한 앎 )가 일어 나야 하는 것이다 .

삼빠잔나를 하게 되면 대상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면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정신상태가 아주 명료 하게 자각이 된다 . “아 무너지는 구나 ” 하는 사띠가 보이고 , “이것도 무너졌구나 ” 하는 그 사띠도 보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붕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이해를 되비쳐야 한다 . 이것을 빠띠위빠사나 (pati-vipassana)라 한다 .

무너짐 또는 붕괴 , 소멸을 빠알리어로 ‘방가 (bha ṅga)’라 한다 . 이 방가를 기점으로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된다 . 16 단계의 지혜 중에 붕괴를 자각 하면서 한 획이 그어 지는 것이다 .

그래서 첫번째 성자를 수다원이라 하는데 이 붕괴를 정확히 인지 하고 관찰 하는 사람을 ‘준수다원 ’이라 한다 . 준 수다원은 아직 수다원이 되지 못하였지만 이대로 곧장 가게 되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 수행에 있어서 반은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 이 준수다원을 빠일리어로 쭐라소따빤나 (cula-sotapanna)라 한다 . 이 시점부터 수행자의 급이 달라 지는 것이다 .

여섯번째 ,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

수행에 있어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일어나고 사라짐 ’을 아는 것이다 . 그 것을 얼마나 명료하게 아느냐가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다면 수행자는 이제 안주 할 곳이 없게 된다 . “어디 가서 의지 할 것이 없구나 ”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하는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

모두 다 사라지니까 어디 가서 도움을 구할 수 도 없다 . 이때부터 공포가 밀려 온다 . “이제 어떻게 될까 ” 하는 공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가 되는 것이다 .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 . 죽어도 피난처가 없고 , 살아도 피난처가 없다 . 여기도 저기도 갈 곳이 없다 .

이렇게 감각대상이 모조리 무너지지만 여섯감각기관은 모른다 . 왜냐하면 관성에 의지 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대상이 무너져 내리니까 어디에다 의지 할 지 몰라 공포가 밀려 오는 것이다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사라지고 자신의 상태가 드러난 것이다 . 이 때도 없던 것이 일어 난 현상으로 관찰 해야 된다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침몰되어 다음단계로 넘어 갈 수 없다 . 이 때 공포감이 일어나면 “나에게 공포감이 일어 나는 구나 ”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

일곱번째 ,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존재한다는 것이 위험한 것이구나 !

공포의 드러남이 극복 되자 이번에는 뭔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느낌이 다가 온다 . 이 존재계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 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구나 ” 하고 아는 것이다 .

왜냐 하면 존재 한다는 것은 다 무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머리카락이 , 이 뼈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어야 되겠구나 ” 하며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 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

존재 하는 곳이 욕계 , 색계 , 무색계인데 , 정신만 있는 무색계에도 가 보았자 무너질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 모든 존재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 나만 몰랐을 뿐이지 과거에도 그랬고 , 현재는 물론 미래도 그럴 것이다 . 이런 통찰이 일어 나면서 “위험 하다 !”라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다 .

여덟번째 ,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결국 고통이더라 !

전에는 좋은 것에 매달렸는데 잘 보니 좋은 것도 고통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고 “아 ,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똑같구나 ” 하는 자각이 밀려 온다 . 따라서 좋은 것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 싫은 것에 매달릴 수 없어 더욱 더 위험 한 것이다 .

이제 매달릴 것 조차 없는 것이다 . 이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오게 되는 것이다 . “좋은 것이라고 매달렸더니 결국 고통이었더라 ”하며 ,그거 조차 사라지니 이제 무엇을 일으키려고 하는 의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

의지를 일으켜서 이루고자 하며 살아 왔고 , 그리고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모두 사라졌을 때 의도적인 형성을 이룬다는 것 , 무지 (무명 )로 인한 행 (상카라 )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정말 위험 하구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

아홉번째 ,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벗어 나야 한다 !

“형성해보야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라는 의욕이 일어남과 함께 이 모든 존재에서 벗어 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 나로 하여금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

그 이전에는 무언가 고통에서 벗어 나고 싶다는 반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존재에서 확실하게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 그러면서 명상에 대한 집중이 안된다 .

앉으면 무너지고 , 앉으면 무너지고 하여 “벗어 나야 된다 ”된다 라는 현상이 발생 되었을 때 이를 잘 관찰 하면서 극복 해야 한다 . 이 때 빠띠위빠사나 (삼빠잔나 )를 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

열번째 , 깊이 숙고 하는 지혜 (pa ṭisa ṅkhā Ñāna)

아무 것도 없다 !

그러면서 반조가 일어난다 . 소리가 이렇게 사라졌으면 나를 구성 하고 있는 오온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 느낌 (受 )이라는 것 , 견해 (想 )라는 것도 현상에서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 순간 순간 일어나는 마음 (식 ) 또한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이와 같은 색수상행식에 대한 반조가 일어 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 “모두 변화 하는 것이다 ” 하는 반조가 일어 나는 것이다 . 반야심경에 있어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 (오온개공 )’는 말과 같다 .

열한번째 ,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

흐르는 물처럼

그러면서 무지로 인한 상카라가 이제 일어나지 않게 된다 .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하여 흐르는 물처럼 조용히 진행 되면서 우뻬까 (평정 )상태로 들어 간다 . 이것이 상카라가 우뻬카 상태로 들어가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이다 .

열두번째 ,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진리와 합일이 일어나며

이렇게 모든 형성이 진정되면서 진리와의 합일이 일어난다 . 일곱가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자신에게 다 일어 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사띠 , 사마디 , 우뻬카 , 삐띠 , 빳사디 등이다 .

이 뿐만 아니라 37 조도품을 자신에게 견주어 보니 그런 “법과 내가 합일 하고 있구나 ” 하는 이해가 일어 나는 것이다 .

열세번째 ,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그러면서 계보 변화가 일어난다 . 서럽게 살아온 중생계보에서 성인계보로 족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 즉 , 도와 과가 일어 나는 것이다 .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 “하고 자기도 사라져 버린다 . 그런데 본인들은 그것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일어 나기 때문이다 . “아 ,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구나 ” 하고 자신의 전 존재가 사라짐을 딱 아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딱 사라지는 것이다 .

고귀한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

다음 표는 출세간의 도와 과를 인식하는 과정을 보인 것이다 .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04200001.t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41pixel, 세로 331pixel

출처 ; http://cafe.daum.net/jetavana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만일 수행자가 출세간의 도와 과의 증득을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를 닦아서 그런 경지에 도달 하도록 한다 .

표에서 출세간의 도의 인식과정을 보면 보통의 경우와 예리한 경우가 있다 . 어느 경우이든지 바왕가의 동요 (V)와 바왕가의 끊어짐 (A)이 일어나면서 의문전향 (D)이 일어 난다 . 보통의 경우 준비 (Pa), 근접 (Up), 수순 (An)순의 단계를 거쳐 종성 (G)이 일어난다 .

종성은 고뜨라부 (gotrabhu)라 하는데 근접삼매에서 본삼매로 들어가는 심찰나를 말하고 , 계통을 바꾸는 마음을 말한다 . 이것은 욕계의 범부의 혈통에서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종성 (種姓 )이라는 표현을 사용 한다 . 종성의 마음 바로 다음에 다섯번째 자와나에서 본삼매에 속하는 첫번째 자와나가 일어난다 .

이것은 5 가지 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이거나 (10), 4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 이거나 (8), 4 가지 도나 과의 마음 가운데 하나이다 (8). 그래서 모두 26 가지가 된다 .

여기서 위빠사나의 도와 과를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가 무르익어 본삼매가 일어날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뚫고 의문 (意門 )전향이 일어난다 .

그 다음에 둘 혹은 세개의 위빠사나의 마음이 무상등의 특상중 어떤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 여기까지가 준비 (Pa), 근접 (Up), 수순 (An)과정이라 한다 . 그 다음에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종성의 마음이 일어난다 . 바로 이 단계가 범부에서 성자로 됨으로써 고귀한 존재가 탄생 되는 것이다 .

열네번째 ~열여섯번째 , ‘도의 지혜 (magga Ñāna)’ ‘과의 지혜 (phala Ñāna)’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 ṇa Ñāna)’

모든 것이 사성제로 보이고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른다 .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이다 .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다 .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

그것은 순간에 일어난다 . 그래서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과에 들어 서는 것이다 . 이렇게 하여 성자가 되는 것이다 . 고통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 성자이다 . 팔라 (과 )를 얻게 되면 그 때 부터 모든 현상이 ‘사성제 ’로 보인다 . 즉 ‘연기 ’로 보인다는 것이다 .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이야기 할 때 얼마나 연기에 달통해 있느냐로 알 수 있다 .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연기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밝고 빛나는 희망적인 성자의 길로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

아직도 갈 길은 멀고 , 고통의 소멸로 가는길 팔정도

도와 과를 얻으면 도인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 도와 과에서는 성자의 지위를 네단계로 나눈다 .

첫번째가 수다원이다 .

두번째가 사다함이다 .

세번째가 아나함이다 .

네번째가 아라한이다 .

수다원을 빠알리어로 소따빤나 (sotapanna)라 한다 . 여기서 소따는 ‘흐름 ’을 말하고 , 빤나는 ‘들어섬 ’을 말한다 . 따라서 ‘흐름에 들어 섰다 ’는 말이다 .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하여 이를 한역 하면 ‘예류자 ’ 또는 ‘입류자 ’라는 뜻이 된다 . 그 길이 무엇일까 . 바로 팔정도이다 . 왜냐하면 팔정도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성스런 길이기 때문이다 .

사다함은 빠알리어로 사까다가미 (sakadagami) 라 한다 . 여기서 사까는 한번 이라는 뜻이고 , 아가미는 온다라는 뜻이 된다 . 따라서 한번 오는 자라 해서 ‘일래자 ’라 한다 .

아나가미 (anagami)는 아가미에 부정 접두어 안 (an)이 붙어서 다시 이세상에 오지 않는 이라는 뜻이 되어 ‘불환자 ’라 한다 .

아라한 (arahan)은 ‘완전하다 ’ ‘완성되다 ’ 라는 뜻이다 . 따라서 어디에도 오지 않는 것이다 .

최대 일곱생이다

16 단계의 지혜를 거쳐 수다원이 되었지만 아라한이 되기 까지는 7 생이 남아 있다 . 7 생을 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최대 7 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

수다원인 채로 죽으면 최대 일곱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 과정에 있어서 감각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고 절대자에게 귀의 할 수도 있다 . 또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도망다니거나 피해 다닐 수 있다 . 그러나 한번 닙바나를 성취한 이상 반드시 일곱생 이내에 해탈을 얻게 되어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수다원과 다른 성자들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

중생을 옭아 매는 10 가지는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10 가지 족쇄가 있다 . 이를 빠알리로 삼요자나 (samyojana)라 한다 . 그런 요소 때문에 윤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이다 . 그런데 수행을 하면 윤회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래서 중생을 옭아 매고 있는 족쇄를 풀어야 하는데 그 10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 가지 족쇄 (samyojana)

 

족 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구분

1

유신견

personality-belief (sakkāya-ditt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거친

(오하분결 )

2

법에 대한 의심

sceptical doubt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잘못된 수행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īlabbata-parāmāsa; s. upādāna)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탐심 )

sensuous craving (kāma-rāga)

 

옅어짐

풀림

풀림

5

악의 (진심 )

ill-will (vyāpāda)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풀림

미세한

(오상분결 )

7

무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풀림

8

들뜸

restlessness (uddhacca)

 

 

 

풀림

9

무지

ignorance (avijjā)

 

 

 

풀림

10

아만

conceit (māna)

 

 

 

풀림

2010-05-09 진흙속의연꽃

첫째 , 유신견이다

유신견은 빠알리로 ‘사까야딧띠 (sakkāya-ditthi)’라 한다 . 까야는 우리말로 ‘몸 ’을 말하고 , 여기에 sat 라는 ‘존재한다 ’라는 뜻이 붙어 몸이 있다는 견해가 유신견이다 . 우리 몸이 있다라는 견해는 삿된견해 (邪見 )이다 . 왜냐하면 우리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회 하기 때문이다 .

둘째 , 법을 믿지 않는 것이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법 즉 , 연기법을 믿지 않고 의심 하는 것이다 . 수다원이 되어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왕따 당하는 듯한 이유는 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노자는 “범부가 욕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 ” 라고 말했다고 한다 .

셋째 , 잘못된 수행이다 .

누군가에게 빌거나 외부적 요소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잘못된 수행의 원인이 된다 . 신에게 빌고 , 공양물을 올리고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수행이 중생을 윤회하게 만든 다는 것이다 .

네번째 , 감각적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

이것은 탐심 (욕심내는 )을 말한다 .

다섯번째 , 악의이다 .

이것은 진심 (성내는 )을 말한다 .

여섯째 ,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

색계는 욕계보다 순화되고 정화된 존재들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 색계를 영어로 fine-material existence 라 한다 .

일곱째 , 무색계에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

무색계는 색계 보다 더 정화된 정신체 (formless material)가 사는 세계을 말한다 .

여덟째 , 들뜸이다 .

아홉째 , 무지이다 .

열째 , 아만이다 .

수다원이 얻는 지혜는

수다원이 될 때 , “모든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구나 ” 라고 이해 하고 정말 자기가 딱 사라진다고 하였다 . 그 때 무엇을 알게 될까 .

“몸과 마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구나 ”라고 알며 첫번째 족쇄가 끊어 지는 것이다 . 이렇게 유신견이 끊어지면 법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없다 . 자기가 직접 경험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 보아야 그 것 밖에 없더라 ” 하고 의심하지 않게 된다 . 이 때 의심이 툭 끊어지고 또한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도 끊어 진다 . 그러면서 누구 한테 기도를 한다거나 의지 해 보아야 그것이 안되는 것을 알고 “나 스스로 이렇게 일어나는 구나 ” 하고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이 툭 끊어 지는 것이다 .

이 세가지 족쇄가 끊어 지면서 동시에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 수다원이 되면 얻는 지혜는 무엇일까 . 굉장한 지혜가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 하다 .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 ” 이것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이 자각 하는 지혜이다 .

7 생을 1 생으로 줄이려면

그러나 수다원은 나머지 7 생을 더 살아야 한다 . 그 7 생을 1 생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앞서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매우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 . 7 생을 더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까 .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즉시 끝내려 할 것이다 .

그런데 수다원 과를 얻었음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탐심과 진심은 변함이 없다 . 그럼 뭐가 달라진 것일까 . 여전히 좋아 하는 것에 대하여 애착은 하지만 , 애착 하는 것에 다가 갔다가 결과가 예상 되면 딱 하고 돌아 온다는 것이다 .

중생은 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업을 짖지만 수다원이 비록 그 관성에 의하여 나가지만 “그렇게 하면 고통이 일어나겠구나 ” 하고 알기 때문에 얼른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 그 얼른 되돌아 오는 기간이 관성을 갖기 까지 7 생이 걸린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은 “내가 이렇게 원인을 일으키면 그 결과에 의하여 고통을 받겠구나 ” 하고 알기 때문에 원인을 짖지 않는다 . 의지적 행동으로 인한 업형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 그 때는 남이 때려도 맞는다 . 왜냐하면 일으키면 자기만 괴롭기 때문이다 . 스스로 일으킴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

세상사람들은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치려 하지만 성자는 자기자신 안에서 해결 하는 것이다 . 놓고 또 놓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편안함이 온다 .

그런데 그런 탐심과 진심이 남이 볼 때는 잘 안 일어 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뿌리는 남아 있다 . 화가 나지만 일으키지 않는다 . 그러나 안에서는 미세하게 일어 난다 . 단지 화를 내는 경향이 약해진 것이다 . 그래서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 그러나 그 뿌리는 남아 있다 . 이 상태가 사다함이다 .

그런데 탐심과 진심이 약해 진 것만으로 무려 6 생이 줄어 버린 것이다 .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 생만 더 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수다원까지는 탐심과 진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유추 해 볼 수 있다 .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는 해결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 구체적으로 그것을 ‘오상분결 ’이라 불리우는 5 가지의 미세한 요소와 ‘오하분결 ’이라 불리우는 것 중에 거친 탐심과 진심의 2 가지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두번째 성자인 사다함은 할일이 많이 남아 있다 . 경계가 오면 미세한 번뇌가 일어 나니까 여전히 자기만 고통 스럽다 . 그 고통을 없애는 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그 고통의 뿌리 쪽에 집중하게 된다 . 그러면서 이것이 무상한 것이고 , 일으켜 보아야 소용 없는 것이라는 명료한 자각이 일어 나게 된다 .

그러면서 뿌리가 딱 끊어진다 . 뿌리가 끊어졌다가 느낄 정도로 정말 딱 끊어 진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아주 깊은 식의 상태에서이다 . 의지적 작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이렇게 거친족쇄인 오하분결이 끊어 지면 아나함이 되는 것이다 .

아나함 정도 되어야 안심

아나함 정도가 되면 이제 안심이 된다 . 왜냐 하면 더 이상 욕계에 다시 올일이 없기 때문이다 . 다섯가지 거친족쇄 (오상분결 )가 완전히 끊어 졌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색계에 나고 , 무색계에 나고 싶은 욕망은 무엇일까 . 아나함쯤 되면 욕계의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모두 끊어 졌기 때문이다 .

아나함이 되면 세속적인 쾌락을 누릴 수 없게 된다 .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 오는 대상에 대하여 흥미가 없어 지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움에 집착 하게 된다 .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쭐라웨달라숫따 (Cūlavedalla Sutta, 有明小經 , SN 41.6)에 나오는 부부이야기 일 것이다 .

아나함이 되면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세상일에 관심조차 없다 . 그런데 아직 미세한 족쇄는 남아 있다 . 미세하나마 편안해지고자 싶어 하는욕망 , 그것도 족쇄가 되어 한 생을 더 살아야 되는 것이다 .

만일 아나함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 색계 정거천에 태어 날 것이다 . 그 곳에서 서서히 족쇄가 해소 되면서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다 .

그러나 욕계에서 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자극 ’이 많기 때문이다 . 자극이 많아서 번뇌가 빨리 일어나야 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천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하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 그래서 이생에서 끝내는 것이 훨씬 더 유익 하다는 것이다 . 이럴 때는 더 고요하고 정화된 세계에서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각 하면서 극복 하는 것이다 .

되비치고 , 또 되비치고

아나함이라는 높은 경지의 성인이라도 ‘들뜸 ’은 있다 . 그것은 어떤 들뜸일까 . 그 들뜸을 찾아 보려 하면 사라져 버린다 . 이거 하려다 말고 저거 하려다 말고 하는 들뜸이 있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들뜸을 극복 하여 해야 할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서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 이제 나를 위해서 할 일은 더 이상 없는데 무언가 남을 위하여 일을 하려 할 때 모든 것을 극복 하려는 에너지가 일어 난다 .

그 들뜸이 극복 되고 무지가 극복 되면 ‘아만 ’도 극복 된다 . 여기서 아만은 자만과 다르다 . 자만은 나를 내세우는 것 (잘난체 )을 말하지만 , 아만은 “아 , 내가 여기까지 왔다 ” “이러한 존재가 나다 ” 라고 하는 기쁨을 말한다 .

아만을 되비치라는 것이다 . 아만이 남아 있는 한 무지 (무명 )가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되비치고 , 또 되비치고 해야 완전한 고통의 소멸에 이른 다는 것이다 .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도 4 과를 순식간에 깨우쳤다는 경전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 . 왜냐하면 ‘인지작용 ’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반드시 좌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다만 후대로 내려 올수록 근기가 약해져서 한번 들으면 이해 하지 못하고 몇 년 , 몇십년을 공부 하여도 깨달을까 말까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정확히 알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료 하게 아는 것 ”이다 .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되고 닙바나를 이루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람마다 단계가 다 다르다 . 단계가 뭉뚱 그려 될 수도 있고 , 순식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 어떤 사람들은 16 단계의 지혜가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 그런 사람들은 수행이 한 순간에 그 말을 들으면서 무르익은 것이다 .

닙바나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길은 이렇게 명료한 것이다 .

이상 깔라야나미따카페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의 아눌라 비구니 스님의 법문을 녹취하여 표를 집어 놓고 자료를 보충 하여 작성한 글이다 . 인터넷에 훌륭한 법문을 법보시한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 참고로 음성파일을 링크 하면 다음과 같다 .

위빠사나 16 단계 및 도와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성스런 이유

불교의 핵심사상은 무엇일까 . 주저 없이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 왜 그럴까 . 그것은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

사성제는 빠알리어로 ‘짜따리 아리야삿짜니 (cattāri ariyasaccāni)’이다 . 영어로는 Four Noble Truths 이다 . 팔정도는 빠알리어로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Ariyo a ṭṭha ṅgiko maggo)’이고 , 영어로 표현 할 때는 Noble Eightfold Path 이다 .

사성제와 팔정도의 빠알리어 제목을 보면 모두 ‘성스럽다 ’라는 ‘아리야 (Ariya)’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또 영어로 표현할 때도 반드시 성스럽다라는 뜻의 ‘노블 (Noble)’이 들어 가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성스런 법이다 . 그 성스러운 법으로 깨달았다면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중에 누가 가장 먼저 성자가 되었을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콘단냐를 비롯한 다섯수행자들에게 설 하였다. 그 때 콘단냐가 최초로 이해 하였다 . 이렇게 하여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굴러간 법의 수레바퀴는 끊임 없이 굴러 왔고, 또 끊임 없이 굴러 갈 것이다.

2010-05-10

진흙속의연꽃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한 덩어리가 아니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가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면, 그동안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서 나라고 알았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을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으로 해체해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이제 몸과 마음은 단지 물질과 정신이고,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님을 압니다.

 

(2)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이 원인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결과일 뿐 그것을 나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매순간 조건에 의한 흐름 있다는 것을 아는 눈이 생깁니다.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항상하지 않고 계속 변하며 이것이 괴로움이고 내가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지혜의 과정입니다.

수행자는 이 단계에서 고통과 비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로 몸에서 통증, 쑤심, 경련, 나른함, 가려움, 혐오, 메스꺼움, 흔들림, 머리의 무거움, 무거운 발걸음 등의 온갖 종류의 불쾌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표상으로는 장례식, 군대, 귀신 등 무섭고 두려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을 그냥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표상이 보이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두려우면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괴로운 느낌과 끔찍한 표상을 보며,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조금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매순간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알게 되어, 괴로움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수행자가 원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평화와 편안함을 경험하고 싶은데, 이 몸은 내가 다스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무아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상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조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괴로운 현상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수행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계속 알아차리면, 이런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가게 됩니다.

 

(4) 생멸의 지혜

통증 등의 괴로운 느낌들을 알아차려 그들의 성품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가 분명하게 현재의 통증, 쑤심, 욱신거림에 초점을 맞추고 정확히 알아차릴 때, 이 통증이 일어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수행자는 알아차림으로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 시작합니다. 점차 통증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하여 통증의 괴로운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제압하며, 이 통증을 아는 마음도 통증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현상의 사라짐을 좇아가는 것이 괴롭고, 이런 괴로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수행자는 느낌의 무상함, 괴로움, 무아를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 단계는 3단계의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에서 느꼈던 괴로운 느낌은 모두 사라지고, 몸과 마음의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그냥 편안하게 대상을 능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바름이 생겨 모든 일을 바르게 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행자의 표정이 항상 온화하며, 부드럽고, 예의 바르며, 행동이 조용하고, 은은하며,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생긴 희열의 즐거움은 범부가 갈애로 느끼는 즐거움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면 더 이상 수행이 진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즐거움에 머무르려는 탐욕을 버리고, 이 편안하고 즐거운 희열의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합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이 희열의 느낌도 꿰뚫어보듯이 분명히 알아차리면 즉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다보면 즐거운 느낌이 무상하고, 바로 괴로움이고,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아는 지혜가 다시 생깁니다. 이제 수행자는 즐거움에 머물려는 탐욕을 버리고, 알아차림을 통해 즐거운 느낌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고, 현재의 즐거운 느낌을 붙잡지 않습니다.

 

(5) 소멸의 지혜

이 단계는 대상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해져, 일어남은 분명하지 않고 사라짐만 느껴지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점점 알아차리는 대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상과 아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수행자는 정신적요소나 물질적요소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며, 소멸의 속도가 너무 빨라 심한 고통은 느끼고, 이것은 비참한 일이며 괴로움이라고 압니다. 이런 사라짐과 이런 심한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알고, 오온을 통제할 수 없는 무아를 좀 더 깊게 알게 됩니다. 소멸의 지혜에서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두려움에 대한 지혜

이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수행자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일어납니다. 언제나 바로바로 사라지는 오온에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고, 수행자는 오온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7) 고난의 지혜

이제 이런 두려움 덩어리인 오온이 잘못된 것이며, 오온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때는 표상으로 썩은 것, 피가 흐르는 것이 나타나며, 이것을 대상으로 고난을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8) 혐오감에 대한 지혜

점차 수행자는 오온이 진저리쳐질 만큼 싫어져서 오온을 혐오하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오온에는 어느 것도 안정적인 것이 없으므로, 이제는 오온을 정말 혐오하며 집착을 줄여갑니다.

 

(9) 해탈을 원하는 지혜

이제 수행자는 오온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천상 세계라도 거기서 다시 오온을 가지고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오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조차도 그냥 놓아버리지만 알아차림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

그러나 여기서 이래서는 진정한 평온, 진정한 재산인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하여 오온을 살펴보는 지혜의 단계입니다.

수행자는 그동안 오온을 어부가 잡아 올린 맛있는 물고기처럼 알았는데, 이제 오온이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줄을 가진 독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독뱀을 낚은 어부는 이 독뱀을 그냥 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독뱀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어부가 독뱀을 그냥 놓아버리면 다시 독뱀에게 물릴 것 같아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독뱀의 목을 꽉 잡고 아주 멀리 던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혜의 수준에서 수행자는 매우 많은 괴로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쑤심, 통증, 경련, 압박, 무거움, 동요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머리부터 무거운 것이 찍어 내려누르는 느낌으로, 허리가 꺾여서 바닥에 닿을 것처럼 무겁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이런 고통과 아픔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다시 다른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고통과 아픔의 느낌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들은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알아차리는 것이 즐거웠지만 이 단계에서는 수행이 즐겁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어렵고 잘 이어지지 않아서 자기 생각에는 수행이 퇴보한 것처럼 느껴져서 절망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가 정상이 아니고 미쳐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다시 수행처로 돌아와 수행을 새로 시작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이 단계는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단계입니다. 몸도 안정적이지 않아 자주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하고, 마음도 들떠서 좌선을 하면 조금 있다가 경행이 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일어나 경행을 하면 그것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매우 낮은 지혜의 수준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현상을 독뱀을 다시 한 번 꽉 쥐는 것과 같은 노력으로 이겨내면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이 단계에서는 앞에 다시 살펴보는 지혜와 상반되는 경험을 합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자동으로 일어나서 알아차림이 대단히 좋아집니다. 이제는 두려운 마음도, 집착하는 마음도, 놀라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부딪치는 즐거운 것이나 참을 수 없는 것이나 모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여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절로 알아서 작용하며, 수행자는 마치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이 모든 긴장에서 벗어나 있어 매우 편안합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수행자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꿰뚫어보는 알아차림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평등심에 머물고 싶은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이것이 평등심에 안주하고 있는 어리석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 다음 단계의 지혜를 성숙시켜야합니다.

수행자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을 꿰뚫어보듯이 지켜보면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제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의 16단계 지혜의 발전과정은 수행자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괴롭고, 즐겁고, 평온한 느낌을 모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느낌에서 갈애를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의 지혜 중 11단계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까지는 수행자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인 12단계에서 16단계의 지혜는 수행자가 쌓아놓은 선업의 바라밀 공덕이 충분할 때, 즉 자신이 행한 선한 바라밀 공덕의 과보가 받쳐주어야 수행을 이어서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14단계 도의 지혜와 15단계 과의 지혜인 열반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보시와 지계로 바라밀 공덕을 쌓으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와 지계는 알아차림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면 저절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이는 바로 알아차림을 하는 마음의 습관을 들여서 일상에서 항상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가신 길이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해탈열반을 향해 나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정신적 현상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단계는 해탈열반을 향해서 가는 수행자는 누구나 경험해야하는 길이며, 그 길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 스스로 여기에 비춰보면 지금 자신이 바르게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러운 중생살이에서 성자의 계보로 , 칠청정과 16 단계의 지혜로 본 사성제

 

‘정체성 ’을 거론 하는 이유는

 

불교란 무엇일까 .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때문에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웃 종교의 경우 기독교란 무엇인가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 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

통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정체성 ’을 거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무언가 명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어떤 스님은 불교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 또 어떤 교수는 불교가 저런 것이라고 말한다 . 깨달음도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고 , 또 다른 이는 저렇게 말한다 .

그런데 초기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는 테라와다에서는 불교가 어떤 것이라느니 , 깨달음은 또 어떤 것이라느니 하고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

초기불교는 오로지 고따마붓다의 가르침만 따른다 . 따라서 깨달음도 고따마붓다가 깨달은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 고따마붓다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 그리고 그 실천 수행방법은 무엇일까 .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 부처님이 법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굴릴 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 ’이고 이의 실천 수행 방법은 ‘팔정도 ’라고 명확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과 동일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그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까 .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나와 있는 것이다 . 이를 칠정정과 16 단계의 지혜라 말한다 .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 . 각 단계를 거칠 때 마다 일어나는 독특한 경계를 체험 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도 (magga)와 과 (phala)를 성취할 때 까지 진행된다 .

그 과정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칠청정과 16 단계 지혜

 

칠청정

 

16 단계 지혜

1

계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 (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 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 ṅkhāvitara ṇ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 (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

4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 (bha ṅga Ñāna)

6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pa ṭisa ṅ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6 과 7 사이에

13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

7

지와 견

(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

14

도의 지혜 (magga Ñāna)

15

과의 지혜 (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 ṇa Ñāna)

2010-05-09 진흙속의연꽃

먼저 계를 청정하게 하고

닙바나를 향하여 갈 때 가장 첫번째로 해야 될 것은 무엇 일까 . 그 것은 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 계는 감각적욕망으로부터 수행자를 보호 해 주는 첫번째 울타리인 것이다 . 그런 계는 네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첫째 , 계목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

둘째 ,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

셋째 ,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이다 .

넷째 , 필수품에 관한 계이다 .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순수한 위빠사나의 길을 따르는 수행자는 사마타수행을 채택하지 않는다 . 그대신 계를 청정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과 물질 (명색 , nama-rupa)의 변화에 대한 수관으로 바로 들어 간다 .

이러한 수관은 근접삼매에 필적하고 이를 ‘찰나삼매 (khanika-samadhi)’라 한다 .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이를 ‘마음의 청정 (심청정 )’으로 간주 한다 .

그 어떤 움켜 쥠도 없이

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 칠정정과 16 단계의 지혜를 얻는 것이 목적일까 . 청정범행 (brahmacharya)을 하는 것이 목적일까 . 수행의 목적을 정의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어떤 움켜쥠도 없이 모든 번뇌들을 완전히 절멸 하는 것이다 .”

여기서 움켜쥠도 없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라는 말과 같다 . 초전법륜경에서 말하는 ‘오취온 (五取蘊 , pancupādānakkhandhā)’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 늙음도 괴로움이요 , 죽음도 괴로움이다 . 슬픔 , 비탄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도 괴로움이다 .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의 원천인 오취온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

첫번째 , 정신과 물질을 구별 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나라는 존재가

16 단계 지혜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될 사항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 보면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청정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견청정이라 한다 .

두번째 ,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고 ,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알어차림이 세밀해지면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먹을려고 할 때 먹으려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고 , 이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상태가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를 이루고 있는 오온이 정신과 물질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닌 연기법에 따라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세번째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마치 도 ()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이 단계가 되면 뭉쳐 있던 개념이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무더기로 보인다 . 또 세상이나 모든 존재가 조각 조각 부서져 보이는 것이다 . 이 때 수행은 한단계 급격하게 향상된다 . 수행이 잘 되어서 사띠와 사마디가 균형 있게 유지 되는 이 때 마라가 출현하는데 통상 10 가지로 본다 .

여기서 마라를 빠알리어로 낄레사 (kilesa)라 하고 우리말로 장애라 한다 . 10 가지 장애는 무엇일까 .

빛이다

수행중에 빛을 보는 것이다 . 빛을 보면 수행자가 “아 , 이제 내가 깨달았구나 !” 라고 생각 하기 쉽다는 것이다 .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단순한 현상임에도 불구 하고 그 좋은 경험을 놓지 못하고 남에게 이야기 하지도 않고 혼자 즐가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길이 아닌 길로 가기 때문이다 .

지혜이다

특히 담마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 그래서 “아 , 이게 이래서 그렇구나 !”라고 너무 기뻐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안다는 기쁨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 그런데 그 길로 따라 가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 도가 아니라 비도로 가는 것이다 .

환희심이다

고요함이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고요함에 감싸이게 된다 . 이럴 때 빠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 이것도 그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조건에 따른 결과이다 . 따라서 앞서 언급한 “그 어떤 것도 움켜 쥐지 마라 ”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 고요함이라는 것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이다 . 고요함은 잠시 일어나는 번뇌인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행복이다

행복함 조차도 번뇌로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그 행복감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 그런 행복감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 행복감이 없을 때 고통을 느낀다 . 행복감은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이다

이 때 하는 말이 “정말 부처님 말씀이 맞구나 ”라고 말하며 아무나 붙잡고 전법 하려 하는 것이다 . 오로지 이것 뿐이라는 믿음에 정복 당하는 것이다 .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 그렇게 집착하다 수행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경우 그 믿음이 깨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된다 .

분발이다

경행이 잘 된다고 해서 밤을 세워 하고픈 욕망이 생겨 나는 것이다 . 좌선을 몇시간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 그러다가 뚝 떨어지면 힘을 잃게 된다 . 그런 분발도 그런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 엄청난 노력이나 에너지조차도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

확신이다

“이 길로 가면 틀림없어 ” 라고 말하는 것이다 . 물론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그런 확신도 조금이라도 미약하게 되면 힘을 잃게 된다 . 그럴 때 “나한테 이런 확신이 일어 났구나 ”라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

평정심이다

우뻬카도 안된다는 것이다 . 우뻬카의 상태도 다 다른데 , 다 다름을 보지 못하면 무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 평정심이 되었을 때 “나에게 평정심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알아차리면 되고 , 평정심이 깨졌을 때 억울해 하지 않고 “가버렸나 보다 ” 하고 집착하지 않는다 .

애착이다

잔잔한 기쁨조차도 되비치지 않는다면 애착이 된다 . 그러므로 되비쳐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열가지 장애를 따라 가다 보면 길이 아닌 곳으로 빠지게 된다 . 마치 도처럼 보이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단지 현상으로 알아차리면 그 길에서 벗어나 도의 길로 갈 수 있다 .

네번째 ,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얼굴표정이 맑고 온화하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성숙되는 단계가 생멸의 지혜이다 . 그 길로 잘 접어 들면 네번째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 그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이다 .

이 단계가 되면 모든 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들어 온다 . 개념이 사라지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한눈에 들어 오는 것이다 .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때 수행이 성숙 된 것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승일 것이다 . 생멸에 지혜에 이른 제자는 다음과 같이 스승에게 비칠 것이다 .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 .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에서 )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스승은 수행자를 보기만 해도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제자의 얼굴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

다섯번째 , 무너짐의 지혜 (bha ṅga Ñāna)

보는 즉시 무너지니

변화하는 현상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이제는 일어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라짐만 보이게 된다 .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 발을 디디면 발이 사라지고 ,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사라지고 , 밥을 먹으면 밥이 사라지고 하는 식이다 .

마치 자신이 발만 디디면 이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붕괴가 일어 나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

이 때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각 하지 못하면 거기서 헤어 나지 못하고 허무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 그래서 전에는 이런 감정이 나에게 없었는데 지금 일어 나고 있는 것을 보면 “없었던 것이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 지금 나에게 붕괴가 일어 나고 있구나 ” 하고 “모든 것이 붕괴 하고 있구나 ” 하고 되비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이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그 이전 (생멸의 지혜 ) 까지만 해도 사띠 (알아차림 )할 수 있었지만 , 붕괴가 일어 나는 그 때 부터는 대상이 잘 보이지 않고 자꾸 사라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 그래서 “ 아 , 무너지는 구나 ” 하고 느끼는데 그 때 삼빠잔나 (sampajaÑÑa, 확실한 앎 )가 일어 나야 하는 것이다 .

삼빠잔나를 하게 되면 대상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면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정신상태가 아주 명료 하게 자각이 된다 . “아 무너지는 구나 ” 하는 사띠가 보이고 , “이것도 무너졌구나 ” 하는 그 사띠도 보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붕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이해를 되비쳐야 한다 . 이것을 빠띠위빠사나 (pati-vipassana)라 한다 .

무너짐 또는 붕괴 , 소멸을 빠알리어로 ‘방가 (bha ṅga)’라 한다 . 이 방가를 기점으로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된다 . 16 단계의 지혜 중에 붕괴를 자각 하면서 한 획이 그어 지는 것이다 .

그래서 첫번째 성자를 수다원이라 하는데 이 붕괴를 정확히 인지 하고 관찰 하는 사람을 ‘준수다원 ’이라 한다 . 준 수다원은 아직 수다원이 되지 못하였지만 이대로 곧장 가게 되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 수행에 있어서 반은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 이 준수다원을 빠일리어로 쭐라소따빤나 (cula-sotapanna)라 한다 . 이 시점부터 수행자의 급이 달라 지는 것이다 .

여섯번째 ,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

수행에 있어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일어나고 사라짐 ’을 아는 것이다 . 그 것을 얼마나 명료하게 아느냐가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다면 수행자는 이제 안주 할 곳이 없게 된다 . “어디 가서 의지 할 것이 없구나 ”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하는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

모두 다 사라지니까 어디 가서 도움을 구할 수 도 없다 . 이때부터 공포가 밀려 온다 . “이제 어떻게 될까 ” 하는 공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가 되는 것이다 .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 . 죽어도 피난처가 없고 , 살아도 피난처가 없다 . 여기도 저기도 갈 곳이 없다 .

이렇게 감각대상이 모조리 무너지지만 여섯감각기관은 모른다 . 왜냐하면 관성에 의지 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대상이 무너져 내리니까 어디에다 의지 할 지 몰라 공포가 밀려 오는 것이다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사라지고 자신의 상태가 드러난 것이다 . 이 때도 없던 것이 일어 난 현상으로 관찰 해야 된다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침몰되어 다음단계로 넘어 갈 수 없다 . 이 때 공포감이 일어나면 “나에게 공포감이 일어 나는 구나 ”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

일곱번째 ,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존재한다는 것이 위험한 것이구나 !

공포의 드러남이 극복 되자 이번에는 뭔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느낌이 다가 온다 . 이 존재계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 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구나 ” 하고 아는 것이다 .

왜냐 하면 존재 한다는 것은 다 무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머리카락이 , 이 뼈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어야 되겠구나 ” 하며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 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

존재 하는 곳이 욕계 , 색계 , 무색계인데 , 정신만 있는 무색계에도 가 보았자 무너질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 모든 존재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 나만 몰랐을 뿐이지 과거에도 그랬고 , 현재는 물론 미래도 그럴 것이다 . 이런 통찰이 일어 나면서 “위험 하다 !”라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다 .

여덟번째 ,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결국 고통이더라 !

전에는 좋은 것에 매달렸는데 잘 보니 좋은 것도 고통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고 “아 ,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똑같구나 ” 하는 자각이 밀려 온다 . 따라서 좋은 것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 싫은 것에 매달릴 수 없어 더욱 더 위험 한 것이다 .

이제 매달릴 것 조차 없는 것이다 . 이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오게 되는 것이다 . “좋은 것이라고 매달렸더니 결국 고통이었더라 ”하며 ,그거 조차 사라지니 이제 무엇을 일으키려고 하는 의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

의지를 일으켜서 이루고자 하며 살아 왔고 , 그리고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모두 사라졌을 때 의도적인 형성을 이룬다는 것 , 무지 (무명 )로 인한 행 (상카라 )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정말 위험 하구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

아홉번째 ,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벗어 나야 한다 !

“형성해보야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라는 의욕이 일어남과 함께 이 모든 존재에서 벗어 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 나로 하여금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

그 이전에는 무언가 고통에서 벗어 나고 싶다는 반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존재에서 확실하게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 그러면서 명상에 대한 집중이 안된다 .

앉으면 무너지고 , 앉으면 무너지고 하여 “벗어 나야 된다 ”된다 라는 현상이 발생 되었을 때 이를 잘 관찰 하면서 극복 해야 한다 . 이 때 빠띠위빠사나 (삼빠잔나 )를 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

열번째 , 깊이 숙고 하는 지혜 (pa ṭisa ṅkhā Ñāna)

아무 것도 없다 !

그러면서 반조가 일어난다 . 소리가 이렇게 사라졌으면 나를 구성 하고 있는 오온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 느낌 (受 )이라는 것 , 견해 (想 )라는 것도 현상에서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 순간 순간 일어나는 마음 (식 ) 또한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이와 같은 색수상행식에 대한 반조가 일어 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 “모두 변화 하는 것이다 ” 하는 반조가 일어 나는 것이다 . 반야심경에 있어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 (오온개공 )’는 말과 같다 .

열한번째 ,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

흐르는 물처럼

그러면서 무지로 인한 상카라가 이제 일어나지 않게 된다 .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하여 흐르는 물처럼 조용히 진행 되면서 우뻬까 (평정 )상태로 들어 간다 . 이것이 상카라가 우뻬카 상태로 들어가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 ṅkhārupekkhā Ñāna)이다 .

열두번째 ,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진리와 합일이 일어나며

이렇게 모든 형성이 진정되면서 진리와의 합일이 일어난다 . 일곱가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자신에게 다 일어 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사띠 , 사마디 , 우뻬카 , 삐띠 , 빳사디 등이다 .

이 뿐만 아니라 37 조도품을 자신에게 견주어 보니 그런 “법과 내가 합일 하고 있구나 ” 하는 이해가 일어 나는 것이다 .

열세번째 ,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그러면서 계보 변화가 일어난다 . 서럽게 살아온 중생계보에서 성인계보로 족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 즉 , 도와 과가 일어 나는 것이다 .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 “하고 자기도 사라져 버린다 . 그런데 본인들은 그것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일어 나기 때문이다 . “아 ,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구나 ” 하고 자신의 전 존재가 사라짐을 딱 아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딱 사라지는 것이다 .

고귀한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

다음 표는 출세간의 도와 과를 인식하는 과정을 보인 것이다 .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04200001.t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41pixel, 세로 331pixel

출처 ; http://cafe.daum.net/jetavana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만일 수행자가 출세간의 도와 과의 증득을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를 닦아서 그런 경지에 도달 하도록 한다 .

표에서 출세간의 도의 인식과정을 보면 보통의 경우와 예리한 경우가 있다 . 어느 경우이든지 바왕가의 동요 (V)와 바왕가의 끊어짐 (A)이 일어나면서 의문전향 (D)이 일어 난다 . 보통의 경우 준비 (Pa), 근접 (Up), 수순 (An)순의 단계를 거쳐 종성 (G)이 일어난다 .

종성은 고뜨라부 (gotrabhu)라 하는데 근접삼매에서 본삼매로 들어가는 심찰나를 말하고 , 계통을 바꾸는 마음을 말한다 . 이것은 욕계의 범부의 혈통에서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종성 (種姓 )이라는 표현을 사용 한다 . 종성의 마음 바로 다음에 다섯번째 자와나에서 본삼매에 속하는 첫번째 자와나가 일어난다 .

이것은 5 가지 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이거나 (10), 4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 이거나 (8), 4 가지 도나 과의 마음 가운데 하나이다 (8). 그래서 모두 26 가지가 된다 .

여기서 위빠사나의 도와 과를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가 무르익어 본삼매가 일어날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뚫고 의문 (意門 )전향이 일어난다 .

그 다음에 둘 혹은 세개의 위빠사나의 마음이 무상등의 특상중 어떤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 여기까지가 준비 (Pa), 근접 (Up), 수순 (An)과정이라 한다 . 그 다음에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종성의 마음이 일어난다 . 바로 이 단계가 범부에서 성자로 됨으로써 고귀한 존재가 탄생 되는 것이다 .

열네번째 ~열여섯번째 , ‘도의 지혜 (magga Ñāna)’ ‘과의 지혜 (phala Ñāna)’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 ṇa Ñāna)’

모든 것이 사성제로 보이고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른다 .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이다 .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다 .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

그것은 순간에 일어난다 . 그래서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과에 들어 서는 것이다 . 이렇게 하여 성자가 되는 것이다 . 고통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 성자이다 . 팔라 (과 )를 얻게 되면 그 때 부터 모든 현상이 ‘사성제 ’로 보인다 . 즉 ‘연기 ’로 보인다는 것이다 .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이야기 할 때 얼마나 연기에 달통해 있느냐로 알 수 있다 .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연기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밝고 빛나는 희망적인 성자의 길로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

아직도 갈 길은 멀고 , 고통의 소멸로 가는길 팔정도

도와 과를 얻으면 도인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 도와 과에서는 성자의 지위를 네단계로 나눈다 .

첫번째가 수다원이다 .

두번째가 사다함이다 .

세번째가 아나함이다 .

네번째가 아라한이다 .

수다원을 빠알리어로 소따빤나 (sotapanna)라 한다 . 여기서 소따는 ‘흐름 ’을 말하고 , 빤나는 ‘들어섬 ’을 말한다 . 따라서 ‘흐름에 들어 섰다 ’는 말이다 .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하여 이를 한역 하면 ‘예류자 ’ 또는 ‘입류자 ’라는 뜻이 된다 . 그 길이 무엇일까 . 바로 팔정도이다 . 왜냐하면 팔정도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성스런 길이기 때문이다 .

사다함은 빠알리어로 사까다가미 (sakadagami) 라 한다 . 여기서 사까는 한번 이라는 뜻이고 , 아가미는 온다라는 뜻이 된다 . 따라서 한번 오는 자라 해서 ‘일래자 ’라 한다 .

아나가미 (anagami)는 아가미에 부정 접두어 안 (an)이 붙어서 다시 이세상에 오지 않는 이라는 뜻이 되어 ‘불환자 ’라 한다 .

아라한 (arahan)은 ‘완전하다 ’ ‘완성되다 ’ 라는 뜻이다 . 따라서 어디에도 오지 않는 것이다 .

최대 일곱생이다

16 단계의 지혜를 거쳐 수다원이 되었지만 아라한이 되기 까지는 7 생이 남아 있다 . 7 생을 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최대 7 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

수다원인 채로 죽으면 최대 일곱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 과정에 있어서 감각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고 절대자에게 귀의 할 수도 있다 . 또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도망다니거나 피해 다닐 수 있다 . 그러나 한번 닙바나를 성취한 이상 반드시 일곱생 이내에 해탈을 얻게 되어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수다원과 다른 성자들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

중생을 옭아 매는 10 가지는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10 가지 족쇄가 있다 . 이를 빠알리로 삼요자나 (samyojana)라 한다 . 그런 요소 때문에 윤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이다 . 그런데 수행을 하면 윤회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래서 중생을 옭아 매고 있는 족쇄를 풀어야 하는데 그 10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 가지 족쇄 (samyojana)

 

족 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구분

1

유신견

personality-belief (sakkāya-ditt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거친

(오하분결 )

2

법에 대한 의심

sceptical doubt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잘못된 수행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īlabbata-parāmāsa; s. upādāna)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탐심 )

sensuous craving (kāma-rāga)

 

옅어짐

풀림

풀림

5

악의 (진심 )

ill-will (vyāpāda)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풀림

미세한

(오상분결 )

7

무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풀림

8

들뜸

restlessness (uddhacca)

 

 

 

풀림

9

무지

ignorance (avijjā)

 

 

 

풀림

10

아만

conceit (māna)

 

 

 

풀림

2010-05-09 진흙속의연꽃

첫째 , 유신견이다

유신견은 빠알리로 ‘사까야딧띠 (sakkāya-ditthi)’라 한다 . 까야는 우리말로 ‘몸 ’을 말하고 , 여기에 sat 라는 ‘존재한다 ’라는 뜻이 붙어 몸이 있다는 견해가 유신견이다 . 우리 몸이 있다라는 견해는 삿된견해 (邪見 )이다 . 왜냐하면 우리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회 하기 때문이다 .

둘째 , 법을 믿지 않는 것이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법 즉 , 연기법을 믿지 않고 의심 하는 것이다 . 수다원이 되어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왕따 당하는 듯한 이유는 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노자는 “범부가 욕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 ” 라고 말했다고 한다 .

셋째 , 잘못된 수행이다 .

누군가에게 빌거나 외부적 요소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잘못된 수행의 원인이 된다 . 신에게 빌고 , 공양물을 올리고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수행이 중생을 윤회하게 만든 다는 것이다 .

네번째 , 감각적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

이것은 탐심 (욕심내는 )을 말한다 .

다섯번째 , 악의이다 .

이것은 진심 (성내는 )을 말한다 .

여섯째 ,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

색계는 욕계보다 순화되고 정화된 존재들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 색계를 영어로 fine-material existence 라 한다 .

일곱째 , 무색계에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

무색계는 색계 보다 더 정화된 정신체 (formless material)가 사는 세계을 말한다 .

여덟째 , 들뜸이다 .

아홉째 , 무지이다 .

열째 , 아만이다 .

수다원이 얻는 지혜는

수다원이 될 때 , “모든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구나 ” 라고 이해 하고 정말 자기가 딱 사라진다고 하였다 . 그 때 무엇을 알게 될까 .

“몸과 마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구나 ”라고 알며 첫번째 족쇄가 끊어 지는 것이다 . 이렇게 유신견이 끊어지면 법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없다 . 자기가 직접 경험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 보아야 그 것 밖에 없더라 ” 하고 의심하지 않게 된다 . 이 때 의심이 툭 끊어지고 또한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도 끊어 진다 . 그러면서 누구 한테 기도를 한다거나 의지 해 보아야 그것이 안되는 것을 알고 “나 스스로 이렇게 일어나는 구나 ” 하고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이 툭 끊어 지는 것이다 .

이 세가지 족쇄가 끊어 지면서 동시에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 수다원이 되면 얻는 지혜는 무엇일까 . 굉장한 지혜가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 하다 .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 ” 이것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이 자각 하는 지혜이다 .

7 생을 1 생으로 줄이려면

그러나 수다원은 나머지 7 생을 더 살아야 한다 . 그 7 생을 1 생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앞서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매우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 . 7 생을 더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까 .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즉시 끝내려 할 것이다 .

그런데 수다원 과를 얻었음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탐심과 진심은 변함이 없다 . 그럼 뭐가 달라진 것일까 . 여전히 좋아 하는 것에 대하여 애착은 하지만 , 애착 하는 것에 다가 갔다가 결과가 예상 되면 딱 하고 돌아 온다는 것이다 .

중생은 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업을 짖지만 수다원이 비록 그 관성에 의하여 나가지만 “그렇게 하면 고통이 일어나겠구나 ” 하고 알기 때문에 얼른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 그 얼른 되돌아 오는 기간이 관성을 갖기 까지 7 생이 걸린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은 “내가 이렇게 원인을 일으키면 그 결과에 의하여 고통을 받겠구나 ” 하고 알기 때문에 원인을 짖지 않는다 . 의지적 행동으로 인한 업형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 그 때는 남이 때려도 맞는다 . 왜냐하면 일으키면 자기만 괴롭기 때문이다 . 스스로 일으킴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

세상사람들은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치려 하지만 성자는 자기자신 안에서 해결 하는 것이다 . 놓고 또 놓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편안함이 온다 .

그런데 그런 탐심과 진심이 남이 볼 때는 잘 안 일어 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뿌리는 남아 있다 . 화가 나지만 일으키지 않는다 . 그러나 안에서는 미세하게 일어 난다 . 단지 화를 내는 경향이 약해진 것이다 . 그래서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 그러나 그 뿌리는 남아 있다 . 이 상태가 사다함이다 .

그런데 탐심과 진심이 약해 진 것만으로 무려 6 생이 줄어 버린 것이다 .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 생만 더 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수다원까지는 탐심과 진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유추 해 볼 수 있다 .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는 해결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 구체적으로 그것을 ‘오상분결 ’이라 불리우는 5 가지의 미세한 요소와 ‘오하분결 ’이라 불리우는 것 중에 거친 탐심과 진심의 2 가지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두번째 성자인 사다함은 할일이 많이 남아 있다 . 경계가 오면 미세한 번뇌가 일어 나니까 여전히 자기만 고통 스럽다 . 그 고통을 없애는 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그 고통의 뿌리 쪽에 집중하게 된다 . 그러면서 이것이 무상한 것이고 , 일으켜 보아야 소용 없는 것이라는 명료한 자각이 일어 나게 된다 .

그러면서 뿌리가 딱 끊어진다 . 뿌리가 끊어졌다가 느낄 정도로 정말 딱 끊어 진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아주 깊은 식의 상태에서이다 . 의지적 작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이렇게 거친족쇄인 오하분결이 끊어 지면 아나함이 되는 것이다 .

아나함 정도 되어야 안심

아나함 정도가 되면 이제 안심이 된다 . 왜냐 하면 더 이상 욕계에 다시 올일이 없기 때문이다 . 다섯가지 거친족쇄 (오상분결 )가 완전히 끊어 졌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색계에 나고 , 무색계에 나고 싶은 욕망은 무엇일까 . 아나함쯤 되면 욕계의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모두 끊어 졌기 때문이다 .

아나함이 되면 세속적인 쾌락을 누릴 수 없게 된다 .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 오는 대상에 대하여 흥미가 없어 지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움에 집착 하게 된다 .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쭐라웨달라숫따 (Cūlavedalla Sutta, 有明小經 , SN 41.6)에 나오는 부부이야기 일 것이다 .

아나함이 되면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세상일에 관심조차 없다 . 그런데 아직 미세한 족쇄는 남아 있다 . 미세하나마 편안해지고자 싶어 하는욕망 , 그것도 족쇄가 되어 한 생을 더 살아야 되는 것이다 .

만일 아나함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 색계 정거천에 태어 날 것이다 . 그 곳에서 서서히 족쇄가 해소 되면서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다 .

그러나 욕계에서 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자극 ’이 많기 때문이다 . 자극이 많아서 번뇌가 빨리 일어나야 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천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하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 그래서 이생에서 끝내는 것이 훨씬 더 유익 하다는 것이다 . 이럴 때는 더 고요하고 정화된 세계에서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각 하면서 극복 하는 것이다 .

되비치고 , 또 되비치고

아나함이라는 높은 경지의 성인이라도 ‘들뜸 ’은 있다 . 그것은 어떤 들뜸일까 . 그 들뜸을 찾아 보려 하면 사라져 버린다 . 이거 하려다 말고 저거 하려다 말고 하는 들뜸이 있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들뜸을 극복 하여 해야 할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서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 이제 나를 위해서 할 일은 더 이상 없는데 무언가 남을 위하여 일을 하려 할 때 모든 것을 극복 하려는 에너지가 일어 난다 .

그 들뜸이 극복 되고 무지가 극복 되면 ‘아만 ’도 극복 된다 . 여기서 아만은 자만과 다르다 . 자만은 나를 내세우는 것 (잘난체 )을 말하지만 , 아만은 “아 , 내가 여기까지 왔다 ” “이러한 존재가 나다 ” 라고 하는 기쁨을 말한다 .

아만을 되비치라는 것이다 . 아만이 남아 있는 한 무지 (무명 )가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되비치고 , 또 되비치고 해야 완전한 고통의 소멸에 이른 다는 것이다 .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도 4 과를 순식간에 깨우쳤다는 경전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 . 왜냐하면 ‘인지작용 ’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반드시 좌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다만 후대로 내려 올수록 근기가 약해져서 한번 들으면 이해 하지 못하고 몇 년 , 몇십년을 공부 하여도 깨달을까 말까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정확히 알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료 하게 아는 것 ”이다 .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되고 닙바나를 이루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람마다 단계가 다 다르다 . 단계가 뭉뚱 그려 될 수도 있고 , 순식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 어떤 사람들은 16 단계의 지혜가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 그런 사람들은 수행이 한 순간에 그 말을 들으면서 무르익은 것이다 .

닙바나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길은 이렇게 명료한 것이다 .

이상 깔라야나미따카페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의 아눌라 비구니 스님의 법문을 녹취하여 표를 집어 놓고 자료를 보충 하여 작성한 글이다 . 인터넷에 훌륭한 법문을 법보시한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 참고로 음성파일을 링크 하면 다음과 같다 .

위빠사나 16 단계 및 도와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성스런 이유

불교의 핵심사상은 무엇일까 . 주저 없이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 왜 그럴까 . 그것은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

사성제는 빠알리어로 ‘짜따리 아리야삿짜니 (cattāri ariyasaccāni)’이다 . 영어로는 Four Noble Truths 이다 . 팔정도는 빠알리어로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Ariyo a ṭṭha ṅgiko maggo)’이고 , 영어로 표현 할 때는 Noble Eightfold Path 이다 .

사성제와 팔정도의 빠알리어 제목을 보면 모두 ‘성스럽다 ’라는 ‘아리야 (Ariya)’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또 영어로 표현할 때도 반드시 성스럽다라는 뜻의 ‘노블 (Noble)’이 들어 가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성스런 법이다 . 그 성스러운 법으로 깨달았다면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중에 누가 가장 먼저 성자가 되었을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콘단냐를 비롯한 다섯수행자들에게 설 하였다. 그 때 콘단냐가 최초로 이해 하였다 . 이렇게 하여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굴러간 법의 수레바퀴는 끊임 없이 굴러 왔고, 또 끊임 없이 굴러 갈 것이다.

2010-05-10

진흙속의연꽃

명상수행과 심신수련

 

[스크랩]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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