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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신문】 불화 속의 명장면(34) 조선전기 <관세음보살도> (전남 강진 무위사 벽화)

by 강소연 posted Mar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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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번뇌 자비로 감싸안는 '청정한 백의'    2007.10.10

 

전남 강진 무위사 벽화 <백의관음도>

1476년 토벽채색 320x280cm 보물1314호

 

전라남도 강진 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무위사에 도착하면, ‘無爲’라는 사찰 이름 탓인지,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그만두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작품을 조사해야 한다는 쫓기는 마음도, 이것저것 탐구해야한다는 호기심까지도 다 내려놓고 한가로이 발걸음 닿는 대로 거닐고 싶다. 무위사 주변에 내리는 따사롭고도 부드러운 햇살, 탁 트인 시야 속 드넓은 하늘에 떠도는 뭉게구름, 그 속에 있으면 흐르는 시간도 유유자적하다.

무위사에는 탱화의 시원적 형태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조선전기 벽화가 있다. 탱화는 보통 조각상의 불존 뒤에 걸리므로 후불탱화라 하는데, 이 후불탱화는 애초부터 걸게 그림의 형태였다기보다 후불벽화에서 후불탱화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국내에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춘 채 남아 있는 후불벽화는 극히 드문데, 무위사 극락전의 후불벽의 벽화는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의 품격 역시 탁월하여 우리나라 벽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의 후불벽에는 1476(성종7)년의 제작연대가 명기된 벽화가 앞뒷면으로 그려져 있다. 앞면에는 아마타삼존도(아미타불과 관음보살ㆍ지장보살)가 그려져 있는데 기막히게 섬세한 고려불화의 기술적 역량에 조선적 창조적 변형이 더해진 역작이라 하겠다. 앞면을 돌아서면, 뒷면에는 붉은 연꽃잎을 타고 흰 옷자락을 펄펄 날리며 내려오는 수월관음을 만날 수 있다.(그림1) 앞 벽면의 아미타삼존도는 극세필의 섬려한 필치에 고급스런 영락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반면, 뒷벽면의 수월관음은 강약 리듬감있는 굵은 윤곽선을 속도감 있게 쳐내려간 모양새가 자못 시원스럽다. 일명 오대당풍 또는 오도자 화풍에 비견되는 조선적 수월관음이, 앞의 고려풍을 계승한 삼존도와는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관음의 높은 보관에는 그 중심에 아미타 화불을 모셨고(그림2), 흰 천의를 보관 꼭대기에서부터 발아래까지 두르고 있다. 그리고 노란빛 황토색을 바탕으로 보름달과 같은 커다란 신광을 둘렀다. 물론 관음보살은 그 신앙의 전파와 더불어 천수천안관음, 11면관음, 송자관음, 어람관음, 준제관음 등 참으로 다양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 중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그려진 관음은 수월관음이라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수월관음 모습은, 높은 보관에 아미타 화불을 얹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흰옷 백의(白衣)를 입고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관음이 화불로 정수리에 아미타불을 얹은 이유는, ‘관음의 자비를 매체로 번뇌 속 중생을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으로 인도한다’라는 상징성을 지닌다고 지난 연재에서 다룬 바 있다.

관음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백색 천의(白衣)인데, 고려시대 수월관음의 대표적 특징으로 꼽히는 투명한 사라 역시 이 백의를 표현함에 있어 고려의 독창적인 해석이 발휘된 것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수묵화풍의 영향으로 이 하얗고 얇았던 사라가 불투명한 백묘로, 그러니까 귀족스러운 풍모보다는 거사와 같은 청렴함이 강조되어 더욱 분명한 흰 옷으로 묘사된다. 관음보살(또는 관음대사)의 ‘백의의 청정한 상은 마치 달이 물에 비친 듯 하네(觀世音子 觀音大士 白衣淨相 如月映水)’라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幻長老以墨畵觀音像求予讚」)에는 묘사하고 있어, 예로부터 청정한 백의관음상은 달이 물에 투영된 환하고도 맑은 모습에 비유되어 예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이 두르고 있는 이 백의는 관음의 청정한 자비를 상징한다. 청정한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친 이미지와 상통하여, 백의나 수월이나 모두 번뇌를 깨는 청정한 구원의 메타포임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세조가 미지산의 상원사 행차하였을 때, 하늘에서 범패소리가 울려퍼지고 휘황찬란한 광채를 느껴 공중을 우러르니 그곳에 흰 천의를 입은 관음보살이 현상하였다고 한다. ‘상서로운 기운이 치솟더니 백의관음이 나타났으며 그 휘황한 원광이 검은 색인가 하면 흰색이요 붉은 빛인가 하면 푸른 빛이었다’라고 최항은 그의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에서 당시의 일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백의관음의 친견을 계기로 세조는 교서를 내려 반역죄, 역적죄, 반란죄, 불효죄, 살인죄, 횡령죄 이외에 해당하는 모든 죄옥수를 용서하고 풀어주었다. 관음의 자비를 몸소 보이신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백의관음의 역사적 유래는 신라시대 의상법사의 행적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이라 이름지었다. 이는 서역에 보타락가산이 있는 까닭이다.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흰 옷을 입은 보살님의 진신이 계신 곳이라 하여 이 뜻을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라고 삼국유사에는 언급되어 있다. 관음이 계신 보타라카(Potalaka)산은 흰 꽃이 만발한 백화수산(白華樹山)이란 뜻이며 이곳은 백의관음이 계신 곳이다. 의상대사가 이곳 강원도 양양의 해변에 낙산사라는 백화도량을 열고자 지은 <백화도량발원문>을 보면, ‘수월로 장엄한 무진상호’를 갖춘 ‘관음의 맑음과 자신의 혼탁함, 관음의 희열의 경지와 자신의 들끓는 번뇌의 경지’를 대조적으로 읊고 ‘보살의 빛을 모두 접해 두려움을 여의고, 몸과 마음 모두 평안하여 한 찰나에 백화도량에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관음의 빛은 번뇌를 깨는 청정 자비의 빛인 것이다. <대일경소>에는 ‘백(白)’이라 함은 ‘보리의 마음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보리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 백화도량에 왕생하는 것일 것이다. 희고 깨끗한 마음ㆍ청청보리의 마음을, 관음의 백의로ㆍ신광으로ㆍ수월과 같은 상호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무위사 관음벽화에는 선재동자가 있을 자리에 대신 노비구가 두 손을 높이 올려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이 벽화 작업에 참여했을 법한 고승인지, 작품 발원과 관련된 왕실의 한 인물인지, 현재는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무엇을 간절히 원했는지는 좌측 상단에 쓰여진 게송로 알 수 있었다.

 

해안의 홀로 고독한 장소 / 그 가운데 솟은 보타라카산 봉우리/

성관음은 계신 바 없이 계시고/ 그 진신과 만난 바 없이 만나네/

영롱한 구슬은 내가 얻기 원하는 바는 아니나/ 파랑새는 사람들이 쫓는 바/

단지 간절히 친견하기 원하옵나이다/ 푸른 물결 위에 보름달의 위용을/

 

海岸孤絶處 中有洛迦峰

大聖住不住 普門逢不逢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遂

但願蒼波上 親參滿月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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