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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신문】 불화 속의 명장면(32) 사천왕상(하): 조선전기 <영산회상도> (日 오사카 사천왕사 소장)

by 강소연 posted Mar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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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 · 가람 · 나라 지키는 위풍당당 수호신     2007. 9.5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나라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라고 정주고을 사람이 달려와 급히 아뢰었다. “일이 이미 절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왕이 물으니, 명랑법사가 답하기를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면 됩니다”하여, 채색 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 명승 12명이 명랑법사를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 비법을 썼다. 그러자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아직 교전도 하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바다에 거센 풍랑이 몰아닥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이름 하였고, 지금까지도 이 절의 법석(法席)은 끊이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제2: 문무왕 법민>

 

가미카제(神風)다.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려 할 때 신의 바람, 가미카제가 불었듯이 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를 공격하려 할 때 이미 그에 버금가는 신의 바람이 불었었다. 이름하여 문두루 비법. 문두루는 산스크리트어 무드라(mudrā)의 음차인데, 그 뜻에 맞추어 의역하면 신인(神印)이다. (무드라는 좁은 의미로 부처님의 손 모양인 수인手印을 가르킨다) 신의 인장, 즉 신의 증표를 보이니 비바람이 일고 물결이 쳐서 당나라 군사는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몰살당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다. 그 후 다시 5만 군사로 침공해 왔으나, 다시 그 비법을 베푸니 당나라 배들이 또 속수무책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문두루로 산을 찍으면(印) 산이 무너지고 모든 수목을 찍으면 수목이 부러지고, 강이나 바다를 찍으면 물이 고갈되고, 물이나 불을 향해 찍으면 그것이 소멸되고, 돌풍이 불다가도 인(印)을 들어 향하면 곧 바람이 멈추고, 또 인(印)을 들어 땅을 향하면 땅이 움직인다. 사방에서 도적이 어지럽게 일어나도 인(印)을 향하면 곧 흩어져 버린다”라고 <관정경>(정식 경전 명칭, 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는 쓰여 있다.

신라 통일의 대업을 마무리한 이 문두루 비법이 행해진 곳은 경주 낭산의 남쪽 기슭, 예로부터 신성시된 신유림(神遊林)이라는 성지(聖地)였다. 채색 비단으로 급조하여 문두루 비법을 행한 이 장소에는 그 뒤 장장 5년의 공사 끝에 우람한 사천왕사가 완공된다. 풀로 만들었던 오방신상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든 사천왕상으로, 문두루 비법은 사천왕법으로, 그리고 신유림 터에는 사천왕사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이 문두루 비법을 들은 제석천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제가 부처님의 위신을 받들어 사천왕에게 명하여 그 신의 이름과 아울러 문두루 비법을 돕도록 권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이에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 사천왕으로 하여금 「집의 사방에서 재난을 물리치고 화를 없애고 모든 삿된 귀신을 경계 밖으로 멀리 쫓아내도록」하였다.”<관정경, 필자 편집인용>

문두루 비법을 수행하고 비호하는 무장 신장으로 사천왕이 지목되는데, 이렇듯 사천왕의 임무는,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을 옹호 유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국가와 국토를 수호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대표적 호국경전인 <금광명경>(경전 정식명칭 金光明最勝王經)「사천왕품」에는, “(사천왕은) 궁전과 집과 도시와 촌락과 변두리의 국경을 옹호하여 그의 원수들을 모조리 물리쳐주고 액난을 소멸하여 안락을 얻게 하며, 남섬부주(인간 세상을 말함) 안에 있는 여러 국왕들로 하여금 흉변이나 쇠망이나 싸우는 일이 없게 한다”라고 쓰여 있고, 이 사천왕을 “세상을 보호하는 왕(護世王)”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듯 통일 직후, 나라를 지키는 첫 호국사찰로 사천왕사가 건축되었고 또 이를 계기로 호국신앙으로서의 불교가 그 정식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여진, 몽고, 거란 등의 외병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이를 물리치기위해 서경 등지에서 빈번하게 사천왕도량이 행해졌다.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사천왕상은 7세기 후반의 그 초기작(사천왕사지 출토 채유彩釉사천왕상전, 감은사 석탑 사리기의 금동사천왕상 등)부터 이미 완벽한 조형성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신라 통일과 더불어 정립된 이러한 호국신앙으로서의 사천왕상의 조형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 천왕문의 거대한 소조 또는 목조상으로 만들어 세워진다. 그리고 대웅전에 걸리는 영산회상탱에도 어김없이 사천왕이 등장하는데, 석가모니 주변을 에워싼 성중(聖衆) 가운데 항상 가장 크게 강조되어 그려져 그 당당한 존재감을 과시하곤 한다. 본 작품에서 확인되는 사천왕은, 조선시대 불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천왕의 시원격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의 존상이라 하겠다.

작품의 가장 왼쪽의 동방 지국천(持國天)은 국토를 수호하는 신으로 푸른 얼굴을 하고 악기 비파를 타고 있다.(연재31 그림3 참조) 얼굴이 푸른빛을 띠는 것은 오방색(五方色) 중 동쪽에 해당하는 색이 청색이기 때문이라 한다. 음악의 신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는 관계로 비파를 들고 있는 것으로 사려된다. 그 옆의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자신의 위덕을 증장시켜 베풀어 만물이 소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본 작품에서는 기다란 보검을 들고 서있다.(연재31 그림3 참조) 어깨의 견갑 장식이 매우 특이하다(그림3). 서방 광목천(廣目天)은 청정한 눈이란 뜻의 정안(淨眼)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위엄을 과시하고 악귀를 몰아낸다(그림1). 권속으로 용을 부리는데, 그러한 이유에서 인지 용을 한 손으로 제압하고(그림2) 그 입에서 여의주를 뺏어 들고 있다(그림1).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본래 부(富)와 재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본 작품에서는 한 손에 오색 빛을 발하는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또 다른 한 손에는 당번(幢幡, 불전에나 불당 앞에 세워 불․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어 부처님의 도량과 그 도량의 수호를 상징하고 있다. 이 다문천은 사천왕 중의 가장 우두머리 천왕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잘 듣는다하여 다문(多聞)이라 한다. 사천왕은 부처님의 설법을 수호하는 수호신에서, 가람의 지킴이,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으로, 우리 전통 속에 그 힘차고도 강건한 모습으로 위풍당당 살아있다. 강소연(미술사학자ㆍ홍익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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